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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우와 슈만
| 2021·03·13 03:47 | VOTE : 7
>백건우와 슈만

여느 피아니스트라면 여간해서 잘 연주하지 않을 슈만 말기의 곡들로 구성한 희귀한 프로그램이었다. 유령 변주곡, 새벽의 노래, 3개의 환상작품집 등 슈만을 괴롭혔던 정신분열의 징후가 곳곳에 드러나는 악상을 어떻게 극복할지 몰랐다.

잘 연주되지 않는 곡들을 무대에 올릴 때 연주자들은 으레 연주효과를 과장하려는 경향을 보이곤 한다. 외면 당하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대중의 편견에 맞서 그 곡의 존재감을 시위하며 몰이해를 극복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비정상적인 프레이징이 만연한 슈만 만년의 작품들을 연주할 때면 더더욱 그런 속성을 감추기 어렵다.

그런데 백건우의 해석은 수묵화처럼 담담하고 담백했다. 슈만 특유의 외향적 갈등, 플로레스탄을 은유하는 장면에서도 인위적으로 몰아치는 대신 자연스런 화해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수묵화의 먹색처럼 프레이징의 중심을 중음역에 짙게 두고, 저음역과 고음역의 음색을 옅게 휘발시키는 흐름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슈만 말기 작품에 유독 빈번히 등장하는 코랄풍 악상에서는 페달로 화음을 겹겹이 중첩시키면서 타건 이후 뒤따르는 잔향의 섬세한 울림을 공기 중 찬란히 발산시켰다. 슈만이 악보에 새긴 화성의 아름다움이 신선한 생명력을 얻는 순간이었다.

‘왜 이렇게 작곡했을까’란 몰이해와 ‘왜 이 곡들을 골랐을까’란 의문으로 객석에 앉아있었다. 그런데 연주를 듣다보니 작곡가가 왜 이렇게 썼는지 확연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주자의 공력은 그만한 수긍을 이끌어낸다. ‘비정상의 정상화’, 독특한 경지를 체험케한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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