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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한국일보] 무대를 잃은 음악가가 외치는 침묵의 비명
| 2020·06·17 22:16 | VOTE : 11
[한국일보: 2020.06.17]

"무대를 잃은 음악가가 외치는 침묵의 비명"

잔혹한 리사이틀이었다. 피아노 앞에서 고독과 사투를 벌이는 연주는 16시간이나 지속되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연주자가 느끼는 감정과 체력의 기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근육의 경직에 몸을 한껏 비틀거나, 먼 곳을 헛헛하게 응시하거나, 건반에 쓰러질 듯 상체를 웅크리거나, 아예 피아노 의자에서 기립해 연주하거나 자세와 표정은 천차만별이어도 연주자의 손만큼은 줄곧 악기를 떠나지 않았다.

정신과 육체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연주자는 왜 이런 모험을 감행했을까. 5월 30일 베를린, 장장 16시간에 이르는 마라톤 연주에 도전한 이는 독일 태생의 피아니스트 이고르 레빗(Igor Levit)이었다.

연주자는 이 공연을 ‘침묵의 비명(silent scream)’이라 이름 붙였다. 전염병으로 공연장이 봉쇄되면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예술가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다 했다. 음악적으로 표현할 방법을 모색하다가 선곡한 작품이 에릭 사티(Eric Satie)의 벡사시옹(Vexation)이었다. 불편한 모욕이나 억압, 학대를 의미하는 곡의 제목은 전염병이 초래한 고립과 붕괴의 위기와 맞닿는다. 이고르 레빗은 침묵과 겸손의 연주로 이에 저항하고 싶었다고 토로한다.

이 작품은 1893년 작곡되었지만 작곡가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발견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긴 음악인데도 악보는 겨우 한 페이지에 불과하다. 연주자는 4줄짜리 단조로운 선율을 840번 반복해 연주해야 한다. 뚜렷한 음악적 내용이나 조성의 중심이 없어 연주자로선 무엇을 표현해야 할지 난감하다. 한번 들으면 쉽게 잊히지 않지만 완전히 기억하기도 힘든 오묘한 악상이다. 작곡가는 수수께끼 같은 악보 첫머리에 의미심장한 요구를 적어 놓았다. “가장 깊은 침묵 속에서 미동 없이 진지하게 연주할 것.”

이 곡을 무대에서 최초로 완주한 사람은 아방가르드의 선두주자 존 케이지였다. 1963년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11명의 동료 음악가와 릴레이를 주고받으며 18시간 40분 동안 독특한 퍼포먼스를 감행한다. 청중을 모으는 홍보방식부터 기발했다. 공연 입장료는 5달러였지만 연주가 20분씩 지날 때마다 그 인내에 대한 대가로 5센트씩 청중에게 거슬러 주었다. 음악회를 감상하는 통상적인 에티켓도 요구하지 않았다. 청중들은 책을 보거나 음식을 먹고 아예 침낭까지 가져와 잠들 수 있었다.

이로부터 7년 후 피터 에번스는 다른 연주자의 도움 없이 오롯이 홀로 이 곡의 완주에 도전한다. 그러나 595번까지만 연주하고 도중에 포기해 버린다. 체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암울한 생각과 무서운 환영 탓이라는 연주자의 고백에 사람들은 이 작품의 마성을 각성한다.

에릭 사티의 음악은 간결한 주제가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미세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특징이다. 기승전결의 서사대신 찰나적인 순간, 과정에 주목한다. 청중들은 음악을 구조적으로 파악하며 진지하게 몰입해 듣기 어렵다.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해야 할 이유도 없다. 이렇듯 사티의 음악은 의도적으로 가벼운 감상을 부추긴다. 이유는 무엇일까. 과도한 의미나 붙박인 기능에 갇힌 예술을 준엄히 깨우치기 위해서였다.

5월 30일 베를린, 이고르 레빗은 840회의 지루한 반복을 제대로 세기 위해 낱장 악보를 840장 출력했었다. 한 번의 연주가 끝날 때마다 한 장씩, 보면대에서 바닥으로 날렸던 악보는 피아노 주변을 감싸며 층층이 포개어졌다. 처절한 사투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묻자 “그저 나 자신을 놓아주었다”라고 응수한다. 우리네 인생처럼 기복과 침체, 환희와 폐허, 두려움과 설렘을 다층적으로 느꼈다는 것이다. 대장정을 함께했던 840장의 낱장 악보는 조만간 경매에 부쳐져 코로나로 무대를 잃은 음악가들을 위해 쓰일 예정이다.

조은아 피아니스트ㆍ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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