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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르토크 피아노 협주곡 3번, 쾌유를 청하는 현자의 기도
| 2021·03·13 03:46 | VOTE : 19
버르토크 피아노 협주곡 3번, 쾌유를 청하는 현자의 기도


>2010년 리버풀, 백건우의 희귀영상

'백건우와 버르토크 피아노 협주곡', 낯선 조합이다. 그의 레퍼토리 목록에서 프로코피에프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처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어서 음원을 찾기도 쉽지 않다. 기획사가 원고를 의뢰하며 동봉한 참고자료는 8분짜리 영상이 유일했다.

2010년 2월, 백건우가 영국의 리버풀 필하모닉과 협연한 버르토크 피아노 협주곡 3번의 실황이다. 지휘자로 바실리 페트렌코가 나선 이 영상엔 전악장이 아니라 1악장만 발췌되어 있는데다 녹음이나 촬영 측면에서도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솔리스트와 오케스트라 간 음량의 균형은 뒤틀려 있고, 협연자를 비춰야할 카메라의 초점은 엉뚱하게도 첼리스트 뒤통수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왜곡된 음질과 화면이 제대로 된 몰입을 방해하지만, 그래도 이 영상은 협주곡 3번에 대한 백건우의 해석을 가늠할 수 있는 흔치않은 소중한 기록이다. 당시 가디언 지는 백건우의 연주를 두고 '위험을 감수하는 뚜렷한 순간과 고요한 존재감이 효과적으로 대비되었다'라 평론했다.

>버르토크: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작곡가 버르토크는 자신의 고난도 피아노곡을 스스로 연주할 수 있었던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24세 때 참가한 안톤 루빈스타인 콩쿠르에선 빌헬름 박하우스와 우승을 겨루다 2위에 입상할 정도였고, 26세부턴 모교인 부다페스트 음악원의 피아노 교수로 부임 했었다.

버르토크는 책상에서 머리로만 작곡하지 않았다. 악보대의 오선지와 건반을 부지런히 오가며 혁신적 실험을 감행 했었다. 이때 손가락과 귀로 검증된 그의 악상은 연주자를 괴롭히는 까다로운 테크닉으로 진화하기 일쑤였는데, 동료들이 연주하기 어렵다 불평하면 악기 앞에서 스스로 극복하는 모범을 보이며 타협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버르토크는 라흐마니노프나 프로코피에프처럼 자신의 작품에 대한 최고의 해석자였다. 피아노를 다루는 버르토크의 독창적 기교는 제자들–죄르지 산도르, 죄르지 세복-에게 전수되어 현대 피아니즘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피아니즘의 확장: 민요 & 타악기

버르토크의 악상에선 때때로 건강한 흙냄새가 느껴진다. 헝가리 시골 구석구석을 여행하며 손수 수집한 마자르의 민요 덕택이다. 작곡가는 오랜 시간 구전되었던 농민음악을 구식 녹음기의 힘을 빌려 오선지에 채록 했었다.

이때 마자르의 민속적 색채는 불협화음이 만발한 대담한 화성, 마디 선에 갇히지 않는 불규칙한 리듬 등 다채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게다가 버르토크는 두 개의 조성을 동시에 활용하는 복조성까지 동원해 선율과 반주 사이에 공통음을 거세해 버렸다. 이처럼 기존 음악어법에 일탈을 일으킨 민속음악의 원시적 뿌리 덕택에 버르토크의 음향은 신선하고도 상쾌하게 들린다.

건반악기를 타악기처럼 취급하는 가학적이고도 파괴적인 타격은 한때 버르토크 피아노 작품의 대표적 상징과 같았다. 피아노 협주곡 1번에선 종종 타악기 그룹을 협연자 등 뒤에 배치하면서 두드리고 때리는 효과를 강조하기도 한다.

선율악기보다 한층 더 리듬을 자유롭게 다루는 타악기적 효과는 상쾌한 추진력과 생동하는 음향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여기에 음량과 음색의 대비를 일으키는 솔리스트와 오케스트라, 그 극적이면서도 격렬한 충돌은 음악적 에너지를 과감히 내뿜어 청중을 매료시킨다.

>버르토크 협주곡의 심장과 영혼, Ditta

피아노 협주곡 1번과 2번은 버르토크의 여느 작품처럼 작곡가 자신의 연주로 초연되었다. 피아노 파트만큼 복잡하고 생경한 오케스트라 어법은 단원들의 원성을 일으켰는데, 리허설 도중 연주를 포기하는 경우가 생길 정도였다.

그런데 우리가 감상할 협주곡 3번은 태생부터 달랐다. 애초에 버르토크의 부인이었던 디타 파스토리Ditta Pasztory의 연주를 염두에 두고 작곡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음악 중에서도 난해하지 않아 이해하기 좋은 예로 손꼽히는 이 작품은 20C 이후 작곡된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도 무대에 자주 오르며 사랑받고 있다.

작곡가 보다 23살 연하였던 디타는 버르토크의 제자이자 2번째 부인이었다. 19살 어린 나이에 스승과 결혼했고 2차 세계대전의 혼란을 피해 미국으로 함께 망명했다. 그녀는 버르토크 만년의 삶까지 23년 동안 헌신적인 내조를 아끼지 않던 동반자였다.

협주곡 3번이 작곡될 무렵, 버르토크 부부는 미지의 대륙에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채 가난에 시달렸다. 게다가 버르토크를 옥죄던 백혈병까지 급격히 악화되었는데 이처럼 일상에 드리운 고통은 버르토크 특유의 대담한 악상, 과감한 실험정신을 일정 정도 상쇄시켰다. 이전 협주곡 1,2번에 만발하던 야만적인 리듬과 불협화음의 충돌이 3번 협주곡에선 명쾌한 서정과 온화한 울림으로 새롭게 진화한 것이다.  

버르토크는 협주곡 3번의 ‘심장과 영혼’을 부인 디타라 여겼다.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녀가 이 작품의 저작권과 연주를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랐다. 부인을 향한 미안함과 애틋함, 고향을 떠나온 슬픔과 향수가 ‘백조의 노래’라 할 자신의 마지막 작품에 투영되었다.

마침 디타의 42번째 생일이 10월 31일로 다가오고 있었다. 협주곡을 깜짝 선물로 선사하기 위해 약병과 오선지로 둘러싸인 침대에서 사력을 다해 작곡했다. 그렇게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시간과 싸우며 필사적으로 매달렸는데도, 이 협주곡은 종결구 17마디를 완성하지 못한 채 미완으로 멈춰 버렸다. 디타의 생일을 아직 한 달 여 남겨둔 1945년 9월 26일, 뉴욕의 웨스트사이드 병원에서 버르토크는 세상을 등졌다.  

>백건우, 건반 위의 구도자

올해 데뷔 65주년을 맞이한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3월의 무대를 위해 선택한 레퍼토리는 자못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앞서 서술했듯 버르토크 피아노 협주곡 3번은 생사의 기로에 선 부부 간의 애틋한 정을 투영한다. 그런가하면 협연 이틀 전에 예정된 독주 리사이틀은 슈만이 정신착란에 사로잡혔던 시기의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

얼어붙은 라인 강에 몸을 던지며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던 슈만은 현실과 공상을 넘나드는 광기어린 악상으로 자신을 처절히 증명했었다. 이처럼 만년의 슈만을 괴롭혔던 환청과 환각, 그만큼 불안정한 혹은 그래서 독창적인 악상의 작품들이 백건우 리사이틀의 주요 골격을 이루고 있다. 유령 변주곡 WoO. 24, 3개의 환상 작품집 Op.111, 새벽의 노래 Op.133. 여느 피아니스트라면 여간해선 잘 연주하지 않을 희귀한 프로그램이다.

데뷔한 이래 65년, 백건우는 ‘건반 위의 구도자’로 불리며 음악적 수행을 끊임없이 정진해 왔다. 2021년 3월의 연이은 무대를 위해 그가 선택한 곡들은 슈만의 말기 작품들과 버르토크의 마지막 피아노 협주곡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왜, 이 시기에 이런 프로그램으로 청중을 만나려할까. 생사의 갈림길까지 구도자를 동행하는 도반은 누구란 말인가. 현실과 공상을 넘나드는 정신의 착란을 그는 음악으로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쾌유를 청하는 현자의 기도

이러한 의미에서 백건우의 연주 중 각별히 고대되는 순간이 있다. 버르토크 협주곡 3번의 2악장. 지금 이 글을 보고 있을, 객석에 함께한 청중들께도 귀 기울여 경청하자 권하고 싶다. 버르토크 협주곡 3번의 2악장. 수평선을 완만히 그리며 긴 호흡을 이어가던 현악 앙상블이 협연자에게 바통을 건네는 순간, 피아니스트는 2분음표의 느린 걸음으로 순도 높은 울림을 펼쳐 놓는다. 건반악기 특유의 청명한 음향은 명상과 치유의 에너지를 찬란히 불러일으키는데, 버르토크는 이 악장에 ‘Adagio religioso(종교적인 아다지오)’라 이름 붙이며 선대 작곡가의 음악을 연결시켰다.

베토벤의 현악4중주 op.132 <병에서 회복한 이가 신에게 바치는 성스러운 감사의 노래>가 그러했듯 우리는 백건우의 연주를 통해 ‘쾌유를 청하는 피아노의 기도’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건반 위의 구도자, 무대에서 희노애락을 헤쳐 온 현자의 고행을 애틋한 마음으로 응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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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백건우와 슈만 21·03·13 106
  버르토크 피아노 협주곡 3번, 쾌유를 청하는 현자의 기도 21·03·13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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