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chopiano 피아니스트 조은아 :: - Portrait

[감수&해제] 위대한 피아니스트
     | 2021·11·11 01:22 | VOTE : 14
해제: 조 은 아

해럴드 숀버그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를 대형서점의 책꽂이에서 처음 발견한 때는 예술고등학교에 다니던 1990년대였다. 카키색 하드커버에 대학노트 크기의 책이었는데, 국내 첫 번역본이었던 당시 책표지에는 저자의 이름이 ‘H.쇤베르그’라 적혀 있었다. 예고 학생의 지식이라 봤자 얄팍하고 빤하지 않겠는가. 저자명을 흘깃 보고 거의 자동반사적으로 음렬주의를 개척한 아놀드 쇤베르크를 연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12음 기법을 발명한 고도의 지력을 갖춘 작곡가가 화성법의 교과서라 할 ‘화성학’을 저술했듯, 피아노의 연주사에도 방대한 서적을 남겼나보다 철석같이 믿었던 것이다.

이 오해가 바로 잡힌 것은 수년이 지난 후였다. <위대한 피아니스트>의 저자는 빈의 작곡가가 아니라 뉴욕 타임즈의 음악비평가이며, 얼핏 비슷해 보이는 이름이여도 아놀드 쇤베르그와 해럴드 숀버그는 엄연히 달리 발음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그러므로 이 책의 개정판이 완전히 새로운 번역으로 출판된다는 사실을 접했을 땐 뛸듯이 반가웠다. 저자명부터 비롯되었던 많은 오해와 오역을 바로 잡고, 시대의 변화를 담은 현대적 문체를 반영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러다 주제 넘게 감수자의 감투까지 얻게 되었다. 금방 직역된 따끈따끈한 원고를 전달받으니 막중한 사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50여년 전 이 책이 처음 출간된 이래로 '피아니스트라면, 피아노 연주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 인정받았던 자타공인의 믿음을 굳건히 지키고 싶었다.

이 책은 피아니스트에 대한 백과사전이다. 피아노가 발명된 18세기 초반부터 저자가 집필을 완료한 1980년대 중반까지 피아노 연주의 총체적 문화사를 속속들이 조명한다. 시간의 풍화에 따라 연주 스타일이 어떻게 변했는지 집요하게 추적하고, 음악사의 발전에 피아니스트들이 어떻게 기여했는지, 그들의 사회적 위치를 반추하면서 현대 연주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광범위하면서도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다른 서적과는 달리 작곡가나 작품보다는 피아니스트들의 활동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피아니스트들이 대거 등장하는데 그들의 인생을 전기처럼 연대순으로 풀지 않는다. 삶의 일부만 소개할 때가 많고, 심지어 챕터의 제목에도 인물의 이름을 감춘 채 독자의 상상력부터 자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컨대 1권 9장의 제목인 ‘결핵, 낭만주의, 시’에선 이름을 언급하진 않지만 쇼팽을 떠올리게 하고, 10장의 제목인 ‘천둥, 번개, 최면, 성적매력’에선 영락없이 리스트를 연결시키며 독자들의 궁금증을 북돋는다. 그런가하면 3시간 이상 연습해본 적 없다는 발터 기제킹의 후일담이나 모든 음을 살아있는 듯 들으려면 3시간 연습이 최대치라던 레셰티츠키의 철칙을 접할 땐 범접하기 힘든 위대한 거장에게서도 소박한 인간미가 느껴져 위안을 얻기도 했다.


이 책 <위대한 피아니스트>는 판테온에 잠들만한, 우리나라로 비유하자면 소위 현충원에 묻힐만한 거장들의 족적만을 쫒지 않는다. 슈타이벨트, 칼크브레너, 크라머, 탈베르크, 고샬크, 헨젤트 등 전공자조차 낯설게 느끼는 잘 알려지지 않은 피아니스트들의 활약상도 소중히 발굴한다. 당대엔 인기를 누렸지만 지금은 뿌옇게 잊혀진, 그러나 피아노 연주 스타일과 기술의 발전엔 유의미한 힘을 보탠 다양한 연주자들의 이름을 만날 수 있으니 무척이나 반갑다.피아니스트로서의 활약상은 거의 조명되지 않았던 한스 폰 뷜로의 일화도 흥미진진한데, 이 낭만파 지휘의 거장은 매일 아침 피아노 앞에 앉아 트릴과 반음계와 옥타브 연습으로 하루를 시작할 정도로 피아노에 일평생 진심이었다.      

저자는 38개 챕터에 걸쳐 피아노 연주스타일의 진화를 세심히 추적한다. ‘바흐는 피아노연주자가 아니었다. 그의 인생에 이 악기가 너무 늦게 출현했다’며 소외시키면서도, 하프시코드 주법과 피아노를 구입했던 프리드리히 대왕과의 일화를 풍성하게 소개하며 ‘음악의 아버지’를 피아노와 연결 짓는다. 이렇듯 저자의 문장 곳곳엔 특유의 재치와 유머가 깃들어 있다. 독서과정 중 실제 웃음이 툭 터져 나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악보를 분석하면서 해당 음악가의 신체적 특징과 연주방식을 추정하는 대목도 매우 흥미롭다. 과거 위대한 거장들의 대다수는 스스로 연주하기 위해 곡을 만들었으므로 악보에 표기된 운지법이나 표현에 대한 섬세한 지시사항들은 연주자의 구체적 신체조건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칼크브레너나 훔멜의 악보에선 건반에 손가락을 가까이 붙여 연주했던 습관이 오롯이 드러나고, 모셸레스의 악보에선 손을 높이 올리는 과장된 몸짓이 투영되어 있음을 증명한다. ‘기름처럼 흐르는’ 모차르트의 유연한 레가토와 ‘연필 스케치처럼 명료했던’ 클라라 슈만의 터치와 ‘원기왕성한 관능’이 넘치던 루빈시테인의 타건 등을 언급하며 수많은 피아니스들이 악기에 어떻게 접근하며 연주기술을 발전시켰는지 그 처절한 시행착오까지도 거침없이 담아내고 있다. 반면 라흐마니노프와 호프만의 피아니즘을 비교하며 기술적 세부사항까지 집요하게 경쟁시키는 장면에선 저자의 인내력에 감탄하면서도 꼭 이렇게까지 꼬치꼬치 따져야하는지 독자로서의 인내력도 시험 당하곤 했었다.

그러므로 이 책의 독자 중 상당수는 인물의 머릿수와 정보의 가짓수에 혼란을 느낄지 모른다. 한 페이지에 너무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한꺼번에 등장하고, 자료의 출처도 들쑥날쑥 방대하니 말이다. 베토벤이라면 슈만의 단 한 페이지짜리 악보를 갖고도 수십 곡의 교향곡을 작곡했을 것이란 한 음악학자 언급이 떠오를 정도다. 숀버그의 이 책이 딱 그렇다. 한 챕터, 혹은 몇 단락만으로도 책 한권의 스토리를 전개시킬만한 다양한 정보와 인물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아니 넘쳐난다.  

저자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료조사부터 스스로 모든 연구를 수행했다고 한다. 신문에 실린 리뷰부터 음악가들이 주고받은 편지, 회고록, 출간되지 않은 필사본까지 방대한 자료들이 광범위하게 인용되고 있다.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건지기 위해 여러 출처를 몇 번씩이나 교차해 확인했다는데, 다만 종종 구전된 사실들을 전할 때는 독특한 태도가 드러나기도 한다.  ‘출처가 불분명하지만 반대로 이런 일이 없었다고 증명된 적도 없다’던가 ‘X의 말을 직접 들은 것으로 보이는 Y의 언급에서 알 수 있듯’ 등의 애매모호한 표현들이 흥미롭다.

이 책에는 피아니스트들을 둘러싼 기발한 일화들이 다채롭게 만발한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 압도되어 미화되었던 피아니스트들의 어둔 이면까지도 적나라하게 해 짚는다. 100년도 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일화를 어떻게 이만큼 실감나게 전할 수 있는지 놀랄 때가 많다. 그들의 공연을 직접 듣고, 얼굴을 마주하며 이야기를 나눈 것처럼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생생히 묘사된다.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던 베토벤이 조율이 뒤틀린 피아노를 어쩌지 못해 즉석에서 반음 높인 조옮김을 감행하는 장면이나, 저녁 공연의 피아노를 고르기 위해 스타인웨이 전시장의 모든 피아노에서 슈만 심포닉 에튀드 전곡을 연주했던 파데레프스키의 일화나, 객석에 앉은 동료 피아니스트에게 운지법을 빼앗길까 두려워 건반 위로 한껏 웅크려 연주한 드 파흐만의 에피소드 등은 마치 신문의 연예면을 읽듯 흥미로운 정보들을 풍성히 제공한다.

저자의 국적 때문이겠지만, 미국 연주자들의 활약상이 실제 그들이 음악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비해 유독 빈번하게 등장하며 중요하게 다뤄지고, 유럽의 음악가들이 미국에서 펼친 연주활동도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반면 아시아 출신의 피아니스트들에 대해 저자는 비판적 의견을 피력한다. 매일 쉬지 않고 연습하는 처절한 노동을 통해 단단하고 날렵한 손가락을 뽐내지만, 음악에 대한 진정한 공감이 결여되었고 풍성한 소리를 공명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편향성은 꽤 다층적이어서 이 정도의 선입견은 감당할만하다. 문제는 다음이다.

클라라 슈만이 리스트에 대해 “연주문화를 퇴보시켰으니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한다.”며 병적인 반감을 뿜어냈듯, 이 책의 저자 역시 몇몇 연주자를 대해선 우려스러울 정도로 신랄한 비난을 쏟아 붓는다. 한번 찍히면 갱생의 여지없이 억지스런 예의로 에둘러 표현하지 않는 것이다. ‘음악계를 대표하는 진정한 사기꾼’, ‘작품 대부분이 난감한 쓰레기’, ‘빛나는 명성은 대부분 속임수에서 비롯됐다’ 등 무자비한 표현들을 난사되는 것이다. 음악은 엄연히 청각적 경험이어서 찰나의 인상을 언어로 새기는데 위험이 따를 수 있는데도 저자는 자신의 판단을 철두철미 믿어버린다. 그뿐인가. 중요한 거장으로 손꼽혀온 이들의 활동이 단 몇 줄에 거의 폭력적으로 압축되기도 한다. 이렇게 홀대 당하느니 아예 언급되지 않는 편이 더 좋았을 정도다.    

대단원의 서사를 마무리 짓는 마지막 챕터에 이르렀을 때, 드디어 완독했다는 성취감보다 이야기가 너무 일찍 중단되어 버렸다는 아쉬움이 압도하는 것도 이 책의 독특한 특징이다. 1980년대 이후의 이야기를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들이 악보에 기보된 내용을 맹신해 순종하는 흐름이 비교적 새로운 경향에 불과하다는 저자의 통찰은 가장 소중한  발견이었다. 이처럼 이 책 <위대한 피아니스트>는 250년 동안 펼쳐진 피아노 연주의 문화사와 기이한 매력을 지녔던 건반 위 위대한 거장들의 일화를 매혹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피아니스트뿐만 아니라 피아노 연주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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